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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은 생각에 있습니다.

생각하는 즐거움에 있습니다.

한 맺힌 자신을 비우고,

그 안을 말씀으로 채우면 인생은 달라집니다.

우리 안에 있는 세상이 변화될 때

인생은 새롭게 태어납니다.

 

 

마음의 온도를 조절하라

 

마음은 정원과 같아서 가꿀수록 아름답다. 돌볼수록 향기를 발한다.

내면의 마음을 가꾸는 사람은 아름다운 사람이다. 고상한 사람이다.

마음을 가꾼다는 것은 인격을 가꾼다는 것이다.

성취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성품이다. 성공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성실이다.

성실에는 황혼기가 없다. 가장 위대한 성취는 무엇을 얻는 것보다 향기로운 사람이 되는 데 있다. 향기로운 사람이 되려면 마음의 정원을 잘 가꾸어야 한다.

마음은 하나님의 활동 무대다. 생명의 근원이 마음에서 나온다.

마음에서 지혜와 창조적인 아이디어가 나온다. 인생을 승리한 사람들은 마음의 세계를 알았다. 그리고 마음을 가꾸고 다스릴 줄 알았다.

 

인간의 마음에는 양면성이 있다. 인간의 마음은 생명의 근원이면서 또한 부패의 원천이다. 악한 생각, 추한 생각, 파괴적인 생각 등 모든 것이 마음에서 나온다.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마음에서 시작된다. 천국도 마음에서, 지옥도 마음에서 경험한다. 사랑도 마음에서, 미움도 마음에서 나온다. 우리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한다. 마음에 가득한 생각을 행동으로 옮긴다.

 

우리가 가꾸어야 할 마음 중 하나는 온유한 마음이다.

온유한 마음은 따뜻하고 부드러운 마음이다.

사람은 차갑고 딱딱한 마음보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찾아간다.

따뜻함과 부드러움은 함께 가는 동반자이다. 따뜻함은 부드러움을 준다.

부드러운 것은 따뜻하다. 강하다는 것은 세고 딱딱하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가장 강한 것은 부드러운 것이다. 또한 모든 것을 살리는 것은 따뜻한 것이다. 따뜻한 온도에서 모든 것이 소생한다. 봄바람은 따뜻하다. 그래서 모든 것을 살린다.

마음이란 너무 차가우면 냉정해지고, 너무 뜨거우면 분별력을 상실하게 된다. 적절한 마음의 온도가 필요하다. 그것은 따뜻한 마음이다.

 

마음의 온도를 조절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먹어야 한다. 우리가 먹는 음식은 에너지가 된다. 그 에너지 가운데 25%는 몸과 정신이 운동하는 데 쓰이고, 나머지 75%는 몸의 체온을 유지하는 데 쓰인다고 한다. 몸의 체온을 유지하는 데 중요한 것이 음식이다. 그렇다면 우리 마음의 온도를 유지하기 위해서도 마음의 양식을 먹어야 한다. 그 양식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매일 말씀을 읽으라. 읽은 말씀을 묵상하는 중에 마음의 온도를 조절하라. 따뜻하고 부드러운 마음 상태를 유지하라. 당신이 품은 마음에 따라 당신 주위의 사람과 환경도 변화되리라. 당신 마음에 푸른 잎이 있으면 평화의 비둘기가 와서 깃들게 되리라.

 

내면으로 떠나는 여행

 

여행을 떠난다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다. 떠남은 새로운 만남을 의미한다. 떠남이 없이 새로운 만남은 없다. 떠남은 벗어버림을 의미한다. 익숙한 것들을 잠시 벗어버리는 것이다. 벗어버림은 비움이다. 비움은 집착을 버리는 것이다.

집착을 버리면 초연해진다. 참된 자유를 경험하게 된다.

두 손을 펴는 것은 단순한 포기가 아니다. 창조적인 개방성이다. 두 손을 펼 때 우리는 붙잡고 있는 것을 버리는 아픔을 경험한다. 그러나 두 손을 펴서 붙잡고 있는 것을 놓을 때, 새로운 것들을 붙잡을 수 있다.

 

인생은 역설적이다. 떠남은 만남을, 버림은 얻음을, 비움은 채움을, 포기는 창조적인 개방성을, 파괴는 창조를 전제한다. 피카소는 “창조가 있기 전에 파괴가 있다.”고 말했다. 그러므로 여행은 모험이다. 가장 가 보고 싶은 땅이 있다면 아직 가 보지 않은 땅이다. 가 보지 않은 땅은 모든 것이 새롭다. 여행은 경이로움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다.

 

여행에서 경험하는 경이로움은 삶을 풍요롭게 한다. 경이로움은 동심에서 나온다. 경이로움은 우리의 눈을 열어 준다. 내면 깊은 곳에서 환희에 찬 소리를 발하게 한다. 경이로움이 없으면 감격이 없다. 감격이 없다면 깨달음도 없다. 깨달음이 없다면 배움도 없다. 배움이 없다면 성장도 없다. 성장이 없다면 의미도 없다. 의미가 없다면 살맛도 없다. 왜냐하면 인간은 의미를 추구할 때 가장 행복하기 때문이다. 여행은 의미를 발견하도록 도와주는 모험이다.

 

여행을 떠날 때는, 그것이 잠시일지라도 철저하게 떠나라. 길을 떠날 때는 전화를 두고 가라. 필요하다면 공중전화를 사용하라. 잠시 전화를 받지 않고 걸지 않아도 우주는 여전히 잘 돌아간다는 사실을 잊지 말라. 길은 떠났지만 마음은 여전히 일터에 있고 집에 있다면 그는 여행을 떠난 것이 아니다.

 

진정한 여행이란 공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마음에 있다. 여행을 떠날 수 없는 사람은 내면으로 여행을 떠나라.

 

내면에 천국이 있다.  내면의 천국으로 들어가는 열쇠는 침묵이다. 거룩한 상상력만 있으면 내면으로 떠나는 여행은 가능하다. 침묵 속에서 내면의 천국으로 들어가라.

 

깊은 바다 속은 항상 고요하다. 폭풍의 눈이 고요한 것처럼, 내면의 깊은 세계는 잔잔한 호수와 같다.  사랑과 지혜로 충만한 깊은 샘이 있다. 여행을 떠나지 못한다고 안타까워할 것 없다. 삶을 풍성하게 해주는 내면의 천국으로 여행을 떠나라.

 

침묵하는 지혜

 

지금 우리는 침묵을 상실한 시대에 살고 있다. 자연 공해만큼 소리 공해도 심각한 문제다. 전화 소리, 차 소리, 그리고 싸우는 소리는 우리 마음을 흔들고 있다. 소리 공해는 마음 공해를 만들어 낸다. 사람들의 마음은 불안하고 공허하다. 방황하는 사람들의 모습 속에서 빈곤한 마음의 현주소를 발견한다. 핍절한 마음과 한 맺힌 마음들은 분노와 원한으로 가득 차 있다. 평강을 모르고 싸움을 일삼는다.

 

빈곤한 마음을 살찌게 하는 것은 침묵이다. 마음이 흔들리면 세상이 흔들린다. 마음의 동요는 불안이다. 동요는 염려와 분노가 두려움이라는 자식을 잉태하고 출산한다. 마음이 요동하면 평화가 없다. 마음이 분리되는 것이 불안이다. 두 마음을 품으면 불안하다. 평강은 두 마음이 하나가 될 때 경험하는 지복의 상태다.

 

침묵은 두 마음을 하나 되게 한다. 한마음에 이르는 영성 훈련이 묵상이다. 침묵 중에 마음을 관찰하는 것이 묵상이다. 조용히 묵상하는 중에 마음의 흐름을 읽으라. 마음을 관조하라. 마치 다른 사람의 마음을 바라보는 것처럼 자신의 마음을 바라보라.

 

처음에는 생각의 퍼레이드가 시작될 것이다. 수많은 생각들이 오고 갈 것이다. 그냥 계속해서 지켜보라. 그러면 어느덧 생각의 퍼레이드는 사라지고 만다. 침묵하면 보게 된다. 침묵하면 마치 잔잔한 호수같이 마음이 고요해진다. 요동하는 호수는 맑지 않다. 그러나 고요한 호수는 맑다. 푸른 하늘을 담고, 하얀 구름을 담고, 버드나무의 모습을 담아 낸다. 그 속에 세상의 모습이 맑게 비친다. 고요한 마음은 그처럼 청정하다.

 

침묵하면 듣게 된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된다. 하나님은 침묵의 친구시다. 침묵은 하나님의 음성이다. 하나님은 침묵 중에 일하신다. 하나님이 만드신 자연을 보라. 침묵 중에 태어나고, 성장하고, 열매를 맺는다. 가장 큰 소리는 침묵의 소리이다. 침묵하면 하나님을 만난다. 그리고 힘을 얻는다.

 

침묵하면 살리는 말을 하게 된다. 침묵하는 사람의 말은 깊이가 있다. 침묵할 줄 아는 사람의 언어는 버릴 것이 없다. 한마디 한마디가 모두 의미를 가지고 있다. 모든 말이 살아 움직인다. 침묵 중에 나온 말은 담백하다. 힘이 있다. 감화력이 있다. 생동감이 있다. 마음을 녹이고, 사람을 살리는 말은 침묵 속에서 나오는 언어다.

 

하루에 5분만이라도 침묵하라. 입을 닫고, 침묵의 세계로 여행을 떠나라. 침묵으로 마음을 살찌우라. 내면의 힘을 키우라. 침묵 중에 들은 것과 본 것을 사람들에게 말하라. 그때 우리의 언어는 천상의 언어가 되고, 우주의 지혜를 담은 언어가 되리라.

 

상처받은 사람의 행복

 

나는 상처를 받고 살았다. 이민 목회를 하면서 많은 상처를 받았다. 상처가 썩어 마음에 독이 될 때도 있었다. 상처는 아프다. 상처는 고통을 준다. 상처는 흔적을 남긴다. 육체의 상처가 흔적으로 남듯이 우리 내면의 상처도 나무의 나이테처럼 흔적을 남긴다. 상처는 영향을 준다. 관계에 영향을 준다. 상처는 쓰디쓴 경험이다.

 

경험은 어떤 시각을 갖게 한다. 상처는 선입견을 갖게 하고, 사람과 사건에 대한 편견을 갖게 한다. 어린 시절에 받은 상처 때문에 일평생을 고통스럽게 사는 사람도 있다. 상처를 품고 한이 맺힌 인생을 사는 사람도 있다.

 

상처는 마음을 상하게 하고 우리에게서 삶의 풍요로움을 빼앗아간다. 상처 속에 사는 사람은 과거 속에 사는 사람이다. 우리는 상처를 치유하고 상처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한다. 자신을 상처로부터, 과거로부터 풀어놓을 수 있는 길이 있다.

 

예수님을 만나는 것이다. 예수님은 상처 입은 치유자시다. 예수님은 상처투성이로 십자가를 지셨다. 배신당하시고, 무시당하시고, 버림받으셨다. 상하시고, 찢기셨다. 상처를 받으신 예수님은 상처받은 자의 아픔을 아신다. 상처는 우리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다. 죄 없으신 예수님에게도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의 상처는 신비로운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 상처에서 거룩한 피가 흘러나왔다. 다른 사람의 상처를 치유하는 피가 나왔다. 예수님은 썩을 고목이 아니라 향나무 같으셨다. 찍혀도 향을 발하는 향나무처럼 예수님의 상처에서는 아름다운 향이 나왔다. 그 향은 다른 사람의 상처를 치유하는 향이었다.

 

십자가 앞으로 나아가서 상처를 내어 놓으라.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서는 먼저 드러내야 한다. 그리고 예수님의 보혈로 치유 받으라. 성령님의 기름 부으심으로 치유 받으라. 그때 당신의 상처는 아름다운 흔적으로 변화될 것이다. 상처는 잘 다루면 복이 된다. 상처 때문에 오히려 잘된 사람들이 많다.

 

미국에 와서, 어린 시절 교과서에서 읽었던 그랜드 캐년을 방문했다. 황홀하리만큼 아름다웠다. 그런데 그랜드 캐년은 땅이 움푹 패인 상처의 결과로 형성된 지축의 변화다. 상처가 깊은 부분일수록 더욱 아름다웠다. 얼마 전 브라질에서 이과수 폭포를 보면서 감탄했다. 나는 이과수 폭포가 만들어진 것은 지진 때문이라는 안내원의 말을 잊을 수가 없다. 이과수 폭포의 아름다운 자태는 지진 덕분인 것이다.

 

상처 때문에 상심하지 말고, 상처 때문에 감사하라. 상처받은 사람의 행복을 누리라. 예수님같이 상처 때문에 감사하라. 상처받은 사람의 행복을 누리라. 예수님같이 상처 입은 치유자로 살라. 당신의 상처로 그랜드 캐년과 이과수 폭포의 영광이 되게 하라. 찍혀도 찍혀도 향을 발하는 향나무가 되라.

 

 

벼랑 끝에 서 본 사람의 행복

 

벼랑 끝에 서는 것은 위험하다. 추락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벼랑 끝에 서 보면 인생이 마지막이라는 느낌이 든다. 인간은 희망하는 존재이다. 희망을 먹고 사는 것이 인간이다. 모든 것이 다 무너질 때도 희망이 있으면 이긴다. 희망은 바라보는 것이다. 인간은 바라볼 것이 있을 때 쓰러지지 않는다. 그러나 그 바라볼 것이 사라지면 인간은 절망한다. 절망이란 바라볼 것이 단절된 상태를 말한다.

 

벼랑 끝에 선 사람은 절망을 직면하는 사람이다. 벼랑 끝에 선 사람은 죽음을 삶보다 더 그리워한다. 산다는 것이 고역이기 때문이다. 살아 있다는 것이 고통이기 때문이다. 내일도 살아야 한다는 것이 오히려 큰 짐이 되기 때문이다.

 

인정하든지 인정하지 않든지 간에 인생은 전쟁터다. 싸움터다. 인간은 치열한 생존 경쟁 속에 살고 있다. 이기지 않으면 지게 되어 있다. 정말 삭막한 것이 인생이다. 지금처럼 변화무쌍한 시대에는 이겼다고 자랑할 것도 없다. 인기도, 승리도 한순간이다. 밀물처럼 밀려왔다가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것이 인기요, 성공이요, 승리다. 이런 황량한 싸움터에서 인간은 누구나 한 번쯤 벼랑 끝에 서는 경험을 하게 된다.

 

실패와 좌절과 절망 중에 벼랑 끝에 선 사람은 추락할까 봐 두려워한다. 벼랑 끝에 선다는 것은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는 것을 의미한다. 맡긴다는 것은 두려운 일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든 것을 스스로 해내는 데 익숙하기 때문이다.

 

스스로 다스리고 조정하면서 살았던 인간이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두 손을 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모든 것을 다 맡길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할 때가 있다.

 

그러나 벼랑 끝에 서는 것을 두려워 말라. 벼랑 끝에 서면 육신의 힘이 아닌 하나님의 힘을 경험하게 된다. 세상의 힘이 아니라 성령의 힘을 경험하게 된다. 추락할 줄 알았던 인생이 오히려 하나님과 함께 하늘을 비상하는 은혜를 체험하게 된다. 노력과 훈련으로도 안 풀리던 인생의 문제들이 하나님의 초월적인 역사로 풀리는 것을 체험하게 된다.

 

벼랑 끝에 서 본 사람은 행복하다. 왜냐하면 벼랑 끝에 섰다가 하늘을 날고 있는 사람들을 만나기 때문이다. 벼랑 끝 바위에 붙어서 피는 꽃의 향기를 맛볼 수 있기 때문이다. 한라산 정상의 바위에 핀다는 돌매화가 그런 꽃이다. 백두산 바위틈에 산다는 노란바위돌꽃도 그런 꽃이다.

 

벼랑 끝에 선 이여, 벼랑 끝이 인생의 마지막이 아님을 잊지 말라. 오히려 벼랑 끝이 당신을 높은 하늘로 날게 하는 복된 장소임을 기억하라.

 

검은 보자기에 싸인 행복

 

하나님이 예비하신 행복은 역설적인 행복이다. 하나님은 신비로운 방법으로 행복을 경험케 하신다. 하나님은 검은 보자기에 행복을 담아서 우리에게 보내실 때가 많다. 고난이라는 검은 보자기, 상처라는 검은 보자기, 때로는 질병이라는 검은 보자기에 행복을 담아 두신다. 가난과 실패의 검은 보자기 속에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보화를 담아 두신다.

 

꿈을 가지고 사는 사람은 형통의 수레를 타기 전에 고난의 수레를 먼저 타야 한다. 꿈꾸는 소년이었던 요셉이 애굽에 내려갈 때 타고 간 수레는 고난의 수레였다. 요셉을 태운 고난의 수레는 거칠었다.

 

고난의 수레를 이끌었던 하인은 검은 옷을 입었다. 검은 옷을 입은 하인은 요셉을 거칠게 다루었다. 요셉의 아름다운 채색 옷을 찢었다. 그를 구덩이에 집어던졌다. 그를 팔았다. 사랑하는 아버지와 이별하게 만들었다. 요셉의 꿈을 찢어 버리고, 좌절과 절망의 수렁에 그를 집어넣었다.

 

요셉을 애굽에 끌고 갔던 검은 옷을 입은 하인은 요셉에게 종의 옷을 입혔다. 11년 동안 종살이를 하게 한 후 마지막에는 그를 감옥에 집어넣고 그에게 죄수의 옷을 입혔다. 그리고 2년 동안 요셉이 그 어두운 감옥에서 잊혀진 존재로 살게 만들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요셉이 그 어두움을 통과하면서 하나님을 만났다는 것이다.

 

요셉은 어두움 속에서 하나님이 예비하신 보화를 발견했다. 결국 요셉은 그에게 찾아온 검은 하인의 손길이 하나님의 손길임을 깨달았다.

스펜서는 “세상의 혹독한 연단이 사실은 하나님의 다정함에서 나온다.”고 말했다. 요셉은 그에게 찾아왔던 혹독한 연단이 하나님의 다정함에서 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검은 하인이 가져온 거친 짐 속에서 하나님의 보석을 발견했다. 요셉이 경험한 하나님의 신비로운 축복에 대해 A.B. 심슨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나님의 보석은 흔히 거친 짐 속에 넣어져 검은 옷을 입은 하인을 통해 우리에게 보내진다. 그러나 그 안에는 왕궁의 보물과 신랑이 주는 사랑의 선물이 들어 있다.”

 

하나님은 검은 옷을 입은 하인만 요셉에게 보내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친히 그와 함께 하셨던 것이다. 스펄전은 “하나님께서 그 자녀를 풀무에 던지실 때는 하나님께서도 그 안에 같이 들어가신다.”고 말했다. 요셉은 어두운 구덩이에서 하나님을 만났다. 보디발의 집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했다. 어두운 감옥에서 밝은 별을 보았다. 결국 그는 어두움마저도 사랑하는 법을 터득했던 것이다.

 

당신이 어두움을 통과하고 있다면 그 어두움마저도 사랑하도록 하라. 당신의 손에 들려진 검은 보자기를 버리지 말라. 연장은 사용할 줄 아는 사람의 것이다. 고난이라는 연장을 잘 사용하라. 피할 수 없는 고난이라면 친구로 삼고 그를 사랑하라. 그때 당신은 검은 보자기에 싸인 행복을 소유하게 될 것이다.

 

고통의 의미를 아는 사람이 누리는 행복

 

고난은 역설적인 행복의 원천이다. 고난은 신비의 세계다. 고난은 겉에서 보면 어둡다. 결코 화려하지 않다. 검은 보자기에 싸여 있는 모습이 고난의 얼굴이다. 그러나 깊이 들여다보면 그 속에 놀라운 보화가 감춰져 있다. 그래서 고난을 변장된 축복, 검은 보자기에 싸인 보배라고 말한다.

 

고난은 하나님 나라의 표지다. 천국으로 들어가는 열두 문은 진주로 되어 있다. 천국에 들어가는 길은 유리같이 맑은 정금으로 되어 있다(계 21:21). 왜 진주일까? 왜 정금일까? 묵상하다가 가슴에 사무치는 음성이 있었다. 그것은  고통을 아는 자만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 는 것이다.

 

진주는 고통 중에 만들어지는 보석이다. 상처 난 조개가 그 상처를 안고 씨름하다가 만들어 낸 것이 진주다. 맑은 정금도 고통 중에 만들어진다. 정금은 뜨거운 용광로의 연단을 통해서 만들어진다. 그래서 욥은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욥 23:10).”고 말했다.

 

하나님 나라를 사모하는 사람들은 배부른 사람들이 아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가 천국을 사모한다. 고통 중에 있는 자가 천국을 사모한다. 하지만 고통을 받는 것이 천국에 들어가는 조건은 아니다. 결코, 천국은 우리의 노력이나 의로운 행위로 가는 곳이 아니다. 천국에 들어가는 조건은 오직 예수님을 믿는 믿음뿐이다.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은 예수님이 받으신 십자가의 고통으로 천국의 진주 문을 만드셨고, 맑은 정금으로 된 천국 길을 만드셨다는 사실을.

천국은 십자가를 아는 자들만 들어간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받으신 고통의 의미를 아는 자들만 들어간다. 십자가는 사랑의 현장이다. 사랑 때문에 고난받으신 고통의 현장이다. 십자가에서 고통을 받으신 예수님은 고통받는 자들을 아신다. 그리고 위로하신다. 고통 중에 있는 사람은 진주로 된 천국 문을 생각하라. 맑은 정금으로 만들어진 천국 길을 묵상하라. 진주와 정금은 한순간에 만들어지는 작품이 아니다. 오랜 기간 고통을 통과하면서 만들어진 보화다.

 

이는 십자가의 고통 후에 나타난 부활의 영광과 같다. 그러니 고통 중에 있는 사람은 낙심하지 말라.

한편, 고통을 달라고 일부러 기도하지도 말라. 고통은 기도하지 않아도 매일 경험하는 인간의 실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원치 않았지만 이왕 찾아온 고통이라면 차라리 환영하라. 그리고 고통의 의미를 깨닫도록 기도하라.

 

의미를 발견하는 순간, 당신의 고통은 하나님의 신비로운 손길임을 알게 되리라. 그래서 고통의 의미를 아는 사람은 행복하다.

 

가슴 아픈 소리를 내는 사람들의 행복 중에서 (지은이 강준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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