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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꿈고프다. 지금도 꿈이 먹고 싶다...아라리오산업 김창일 회장
전교학신문]‘현대미술의 큰 손’ (주)아라리오 산업 김창일 회장

김창일(54) (주)아라리오 산업 회장. 아라리오 갤러리를 비롯, 천안 고속버스 터미널, 백화점, 멀티 플렉스 영화관을 가지고 있는 그의 이름은 두개다. 김창일이란 이름이 CEO로서 그의 정체성을 드러내 주는 것이라면, CI KIM은 콜렉터와 작가로서 그의 정체성을 드러내주는 이름이다. 그는 CEO로서 뿐 아니라 현대미술의 큰 손으로 국내외에서 명성을 날리고 있다. 1978년부터 현대미술 작품 3000여점을 수집해온 그는 영국의 현대미술 작가중 슈퍼스타로 꼽히는 데미안 허스트의 작품 ‘Hymn’을 250만불(한화 25억원)에 들여와 일약 국내 화단의 주목을 받은 바있다. 지난해 중국 베이징에 아라리오 갤러리를 개관하고, 2005년 독일권에서 영향력있는 ‘세계의 미술계를 지배하는 100명’에 뽑히는가 하면 왕광이 위에민준 등 중국 스타군단 작가들을 한꺼번에 스카우트하는 등 국제적으로도 성가를 높이고 있다. 작년 그가 판매한 작품은 시가 700만불어치(약 70억원)나 된다.

― 흔히 부자가 수집하는 그림 하면 이른바 거실에 걸어놓음직한 살롱화를 연상하기 쉬운데요. 아라리오 갤러리 주변에 설치돼있는 ‘유물론자’의 선동적 조각, 현재 전시중인 요르그 임멘도르프의 작품을 보면 그쪽 취향이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심지어 “프롤레타리아 예술가는 산발적으로 투쟁하지 말고 조직적으로 대항하라”는 격문의 그림등이 전시중인데 김회장 취향인가요.

“하핫. 럭셔리의 극치인 백화점 옆에 사회주의 사상의 작품, 부조화가 극단적 상충을 빚고 있는 풍경, 재미있지 않습니까. 동물원 옆에 미술원보다는 덜 모순적인 것 같은데요. 글로벌 시대에 이념이나 사상은 의미가 없다고 봅니다. 삶의 본질, 일상을 다시 보게끔 충격을 주는 것, 그것이 바로 예술의 존재이유라고 생각합니다.”

글로벌 시대에 사상은 무의미

― 일부에선 김회장이 자본의 논리를 예술시장에도 그대로 적용한다는 비난도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미술시장이고 사업이고 환경에 적응해야만 살아남습니다. 공룡이 약해서 멸종했나요? 환경에 적응못해서 아닙니까. 이제 국내 현대미술계도 과거의 자전거시대적 사고에서 벗어나 자동차시대로 진화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작가, 화상, 콜렉터 전시공간의 4바퀴를 갖춰야 제 기능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베이징에 아라리오화랑을 개관한 것도 한국작가들이 그레이트 아티스트가 되기 위해선 세계적 전진기지가 필요하다는 점에서지요.”

― 화랑 주변의 CI KIM이 붙은 조각엔 ‘I’m hungry. I wanna eat a dream’이란 글귀가 거의 다 붙어있습니다. 입구 인형에도, 심지어 엘리베이터의 소품에도 붙어있던데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

“나는 꿈꾼다. 고로 존재한다는 말을 절대 신봉합니다. 꿈이 없이 산다는 것은 죽는 것과 다를 바 없지요. 꿈을 통해 세상을 보는 것 아니겠습니까. 꿈을 먹는다고 구태여 표현한 것도 특별한 것이 아니고 일상적이 되어야 한다는 뜻에서입니다. 애벌레가 7번의 탈바꿈을 통해 매미가 되듯, 나는 끊임없는 변화를 통해 나를 만들고 싶습니다. 아직도 나는 꿈 고파요. 그래서 꿈을 먹는다고 표현했지요.” 그러면서 김회장은 자신의 명함을 내밀었다. 그의 명함에는 Ci Kim이란 글자의 구멍이 뽕뽕 뚫려 있었다.

“Ci란 발음으로 see와 통하지 않습니까. 나는 늘 일상을 관찰하고 엿보고 거기에서 영감을 얻습니다. CEO를 하면서 어떻게 예술활동을 하느냐고 궁금해 하는데 제겐 경영이 예술이고, 예술이 경영이어서 서로 영감을 줄 수 있는 상보적 관계입니다.”

지천명의 나이를 넘어서도 하루도 쉬지 않고 꿈을 매끼 먹는 사나이, 김창일 아니 CI KIM과의 인터뷰는 이렇게 시작됐다. 삶과 예술은 별도의 것이 아니라 함께 어우러져야 한다는 그의 작업실은 그 자체가 하나의 설치미술 공간인 듯했다. 정원 바닥에 가지런히 놓여있는 구두 한켤레도 사실은 바닥에 본드붙여놓은 설치미술이고, 배달되어온 소포 상자에 색동칠을 해놓은 것도 또하나의 작품이다. 심지어 자신의 구멍난 팬티에도 꿈을 덧칠하고, 예술의 오브제로 삼는다는 그의 말답게 작업실에선 사람도, 가구도, 일상용품과 예술품이 구별없이 어우러지고 있었다. 작업중 물감이 더덕더덕 묻은 남방을 입은 채로 진행된 인터뷰에서 그는 “내 히스토리를 내가 이야기하는게 영 어색하다”면서도 풍부한 우화와 은유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경영과 예술은 상보적인 관계

#꿈을 무의식에도 포맷하라

중고생시절엔 모범생이란 소리를 듣던 그가 스스로 인생의 가장 쓴맛을 처음 본 시기로 추억하는 것은 3수 때다. 재수만 해도 그러려니 했지만 3수를 하게 되니 주위의 냉대가 견디기 힘들었다. 늘 책상옆에 수면제 30알을 안고 살던 시절이었다.

“남의 모멸과 무시를 받는다는게 정말 힘들더군요. 인생의 낙오자라고 체념하다보니 툭하면 주위사람들과 싸우게 되고, 집안의 말썽쟁이였지요. 시험끝나는 종은 울려대는데 답을 다 알면서도 연필이 안움직여 진땀을 흘리는 꿈을 지금까지도 꿀 정도라니까요.” 돌아보니 어려웠던 그 시절은 독이 아니라 나중에 약이 되더란다. 자칫 약을 먹고 죽었을 수도 있는데 어차피 덤인생이라 생각하니 과감히 ‘못먹어도 고’를 외치며 실행지수를 높일 수 있더란 고백이다.

3수끝에 대학에 입학한 후 곧 육군 의장대에 입대한 그는 단체기합등 모진 훈련을 받아야 했다. 처음에는 자신의 ‘꼬이는’팔자에 대해 원망도 많이 했지만 결과적으로 정신적으로 단련하기엔 더없이 좋은 시기였다. 세상에 품었던 원망과 스스로에게 품었던 혐오란 독소를 거친밭에서 호미로 김매듯 골라내 좋은 흙으로 바꿀 수 있었다.

“새벽에 보초를 설 때면 사방이 캄캄한데 벌레소리만 크게 들려요. 저절로 세상이치, 나에 대한 명상에 집중할 수 있었지요. 어느날 문득 지나간 일들에 대한 후회가 밀려오더군요. 인생 역전이란 것은 분명히 있고, 내 노력에 의해서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지요, 쓰라린 후회와 원망에 발묶여 있지 말고 내가 가야 할 곳을 찾아야 하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그에게 악몽이 시험꿈이라면 길몽은 잠자리의 노래꿈이다. 옆의 잠자리들은 모두 노래를 부를 수 없다고 포기하지만 한 잠자리는 끝까지 어떻게든 해보겠다고 도전한다. 처음엔 가까스로 버버버 답답하게 나마 소리를 내던 잠자리가 마침내 득음, 자신의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는 경지에 도달하는…

“목표라는 것도, 꿈이라는 것도 포맷해야 한다고 봅니다. 술에 취했어도 어떻게든 집에 찾아가듯이 자신의 꿈을 무의식속에까지 강하게 포맷시켜놓으면 어떻게든 성취할 수 있다는게 내 생각입니다. 저는 무엇인가를 하게 되면 의식이 없어져 버릴 정도로 빠져서 일합니다. 목표를 확실히 정해보십시오. 벌에게 따로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본능적으로 꽃을 찾아가지 않습니까.”

도마뱀경영으로 큰 실패 없어

“올바른 목표와 꿈을 가졌는데도 안되더란 이야기를 종종 듣습니다. 그런 말을 들으면 난 이런 비유를 하지요. 꿈이란 온실속에서 속성재배하는 6개월짜리 하우스 딸기가 아니라고요. 쉽고 빨리 얻을 수 있는게 아니니 지구력으로 도전하라고요.”

#나는 태어났다, 나는 죽을 것이다.

대학 졸업후 청년 김창일은 어머니의 부탁으로 천안고속버스 터미널 매점 5곳의 운영을 맡게 된다. 꾀죄죄하고 불결한 느낌이 나는 매점을 직영화하며 그가 맨 처음 한 것은 알루미늄 섀시로 단장하고, 모든 물건을 일목요연하게 재배치한 것. 이같은 리노베이션(?)으로 29세때 이미 월매출 억대의 청년사업가로 부상할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고객이 보기 좋게끔 매장을 일제히 꾸민 것, 그것이 바로 현대미술의 설치와도 통하는게 아닐까 싶어요. 그때 알사탕부터 시작, 온갖 쪼잔한 것 다 다뤄보니까 그보다 큼직한 물건 다루게 되더라도 겁이 없어지더군요. 여러가지 경험을 통한 충격을 많이 겪다보니 진화하기 위한 본능이 발동했다고나 할까요.”

사업을 벌인 후, 큰 실패는 안했다는게 그의 술회다. 직원이 자기를 싫어 떠나는 것은 모르지만, 자기의 부실경영으로 직원이 일자리를 잃게 해서는 안된다는 책임감때문이다. 그는 큰 실패를 안한 비결로 도마뱀 경영을 들었다.

“위험하다 싶으면 도마뱀 자르듯 얼른 잘라낸다는게 내 방침이에요. 그간 월남국수 체인점 등 거액을 투자, 몇몇 실패한 건이 있는데 미련은 갖지 않아요.

그렇다면 미술품 수집등 문화산업은 왜 도마뱀 자르듯 자르지 않았을까.

“그야 분명한 존재가치와 목표가 있었기 때문이지요. 제가 멀티플렉스를 한다고 할 때 남들은 갤러리아 백화점 재임대한 돈으로 편히 살라고들 말하며 백이면 구십구가 반대했어요. 하지만 내 꿈이 눈앞에 환하게 보이는데 어떻게 참아요. 꿈과 존재의 이유가 분명하면 제대로 해보는 것이지요. 꿈은 돈과 상관이 없거든요.”

그는 주어진 조건과 환경에 꿈의 사이즈를 맞추기보다 꿈의 사이즈에 조건을 맞추는 타입이다. 자신의 꿈을 현실화하는데 700억원이 필요하다는 계산이 나오자 그때부터 모자란 400억원을 메우기 위해 구두창이 닳도록 뛰어다녔단다. 꿈을 세우고,그것의 현실화가 눈에 그려진다면 두려움은 절로 사라질 수 밖에 없었다. 그다음엔 700억원이나 700만원이나 다름없게 느껴지더란 이야기다.

감동의 문화센터 만드는 꿈꿔

“대학교때 인사동을 찾은 적이 있었어요. 다른 거리와는 무엇인가 다른 분위기가 느껴지더군요. 왜 느티나무 잎 자체는 쓸모없지만, 느티나무가 이루는 그늘은 동네사람을 편하게 쉬게 하고, 이야기를 만드는 휴식터가 되잖아요. 그런 감동을 만드는 문화쉼터를 만들고 싶은 꿈을 간직해왔지요.”

김회장은 주위에서 이런 말하지 말라는 지적을 자주 듣는다면서도 “늘 죽음을 염두에 두고 산다”고 털어놓았다. “죽음을 외면하지 않기에 오히려 하루하루를 충만하게 채우며 열심히 살고 싶다”는 이야기로 인터뷰의 마침표를 찍었다. 화랑을 나오는데 곰돌이가 안고있는 팻말의 글귀 “나는 고프다. 꿈이 먹고 싶다”는 글귀가 남다르게 느껴졌다. 과연 우리는 매끼 어떤 꿈을 먹고 살 것인가.

■ 김창일 회장 프로필

△1951년 부산생. 1966년 휘문고 졸업. △ 1969∼72년 대학입학 낙방후 3수. 인생중 가장 힘든 기간이었지만 어른으로서 성장할 수 있는 결정적 자극을 받은 시기 △1972년 경희대 경영학과 입학 △1973년 육군 의장대로 입대. 신체적으로 힘든 가운데 정신적 단련의 기간이 됨. 군대시절 PX에서 일한 것이 훗날 사업경영에 자신감을 줌 △1978년 천안시로 이주. 천안 고속버스 터미널 개관 1978년 이상범 화백의 작품을 사는 것으로 미술품 콜렉트 시작 △1986년 (주)아라리오 산업 대표이사 △1989년 아라리오 화랑 개관 △2002년 데미안 허스트의 작품 ‘Hymn’구입, 아라리오 화랑 재개관. 전시회 ‘꿈나무-’개최. 이 전시회를 통해 팝 아티스트로 인정 △2003년 아라리오 산업 회장

김성회기자/saint@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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